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팔 전투 (문단 편집) === [[무타구치 렌야]]의 각종 일화 === * 임팔 작전 도중 어느 작전 참모가 식량과 탄약 보급을 어떻게 하느냐 묻자 >무타구치: 뭐가 문제인가? >부하: 사령관님. 전체에 돌아가는 음식은 어떻게 운반합니까? 트럭도 없는데... >무타구치: (걱정 없다는 듯이) 뭐가 걱정인가? 포탄은 자동차 대신 말과 소에 싣고 가다가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말과 소를 먹으면 될 거 아닌가? 이름하여 '''[[칭기즈 칸]] 전략'''[* 짐승에게 최소한의 보급품만 지워서 진격하는 전법은 과거 많이 사용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특수임무에 가까운 급습과 후발대로 오는 치중대와의 연계를 고려해서 결정하는 것이 정석이다. [[유목 제국]]으로 말과 소 등의 가축이 차고 넘치던 몽골 제국과 일본 제국의 상황은 같을 수가 없을 뿐더러, 더구나 이 때는 빠른 기동력을 살린 진격이 불가능한 전장 상황이었다. 심지어 지가 예시로 든 [[칭기즈 칸]]마저 보급의 중요성을 알고 았어서 최대한 열량이 많으면서 부피도 적은 [[보르츠|비상식량]]을 대량을 비축하고, 역시 양곡을 비롯한 식량 수송을 고려했다. 운반책인 가축들을 잡아먹는 전략은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했다. 이렇게 잡아먹는 것을 공식적으로 전략안에 설정한 경우는 [[고구려]]를 침공한 [[당태종]]의 사례인데, 그 역시 마냥 막무가내로 이런 방법을 제시한 게 아니라 고구려의 청야전술과 수상수송 차단 전술에 대한 대비책으로 먼저 소와 말, 양 등을 대량으로 확보한 후에 빠르게 진격하여 일단 거점과 진격로를 확보하여 본국의 치중대를 기다리는 와중에 갖고 있던 식량과 여분의 가축을 소비하자는 논리였다. 역시 치중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썼다. 이렇듯 어떠한 경우라도 보급책 확보는 필수적인 것으로, 대책없이 운송수단을 식량으로 써버리는 것은 무책임한 발상에 불과하다.]! 말과 소를 이용해 음식으로 쓰면 되지! 이거 간단한 거 아닌가? * 임팔 전선의 전황이 악화되던 당시 자신은 전선 지휘부 옆에다 기생집을 차려놓고 무조건 오후 5시 땡~ 하면 업무 마치고 기생집에 들어가서 [[술]] 마시며 노느라 나오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황이 한참 악화되자 전선 지휘도 제대로 안 하는 주제에 사령부 옆에다가 제단을 쌓아두고 신령들에게 이기게 해달라고 비느라 그나마 주간에 하던 업무 처리조차 전부 뒤로 미뤄버렸다. * 임팔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에 신문기자단을 모아놓고 그 앞에서 인터뷰를 했다. >임팔은 문제 없다. 3주일이면 충분히 뺏을 수 있지. 그러나 그 다음의 문제가 있단 말이야. 임팔 정도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 자동차, 전차, 대포 따위는 적의 것을 빼앗아가지고 우선 [[브라마푸트라 강]]으로 나간다. 여기가 브라마푸트라 강이야. 여기서 [[캘커타]]로부터 뻗어나오는 벵골 철도와 아삼 철도를 차지한다. 제대로 들어맞으면 레도도 탈취한다. 아니 [[델리]]의 [[붉은 요새|붉은 성벽(城壁)]]까지 진격하는 거지. 어때, 하하하. * 휘하 병사들은 그에게 '적보다 무서운 바보 대장' 혹은 '[[귀축]] 무타구치'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각하가 좋아하시는 건 첫째가 [[훈장(상훈)|훈장]], 둘째가 [[여자]], 셋째가 [[기자]]."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 임팔 전투 도중 패색이 너무 짙어지자 철수를 요구한 연대장에게 이렇게 일갈했다. >作戰が 上手く いかないのは 精神力が 足りない せいだ。 >---- >작전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는 것은 정신력이 부족한 탓이다.[* 물론 군의 사기(정신력)는 중요하지만, 사기를 높이고 싶으면 '''적절한 보급을 통해 군이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지하게 해주어야 '''한다. 괜히 [[손자병법]]을 비롯한 모든 병법서에서 '''보급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게 아니다. 이 작자는 자기는 장교로서 기본적인 임무도 대충 하면서 아랫사람들에게만 무한한 정신력을 강요했기 때문에 이 사단이 일어났다.] * 임팔 작전으로 병사 9만 2천 명을 전투도 제대로 하지 않고 1만 3천 명으로 줄여버린, 그 어떤 연합군 장성도 못해냈을 희대의 업적을 달성한 무타구치 렌야는 '이 일에 대해 큰 책임감을 느낀다. 차라리 [[자결]]해 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상투적으로 말하곤 했다. 그러자 수석부관 후지와라 이와이치(藤原岩市)는 이 말을 하면서 [[권총]]을 건넸다고 한다. >무타구치: 作戰の 失敗の 責任を 取って、腹を切って 陛下や 死んだ 將兵に お詫びしたい > >후지와라: 昔から死ぬ、死ぬと いった 人に 死んだ ためしが ありません。司令官から 私は 切腹するからと 相談を 持ちかけられたら、幕僚としての 責任上、一應 形式的にも 止めないわけには 參りません。司令官としての 責任を、眞實感じておられるなら、默って 腹を切って下さい。誰も 邪魔したり 止めたり 致しません。心置きな く腹を切って下さい。今回の作戰(失敗)は それだけの 價値が あります。 >---- >무타구치: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할복하여 폐하와 죽은 장병들에게 사죄하고 싶군. > >후지와라: 옛부터 '죽자, 죽자' 하는 사람치고 죽은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사령관께서 '나는 [[할복]]하겠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부관의 책임상 우선 형식적으로라도 말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령관께서 책임을 참말로 실감하고 계신다면, 조용히 배를 가르십시오. 아무도 방해하거나 말리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배를 가르십시오. 이번 작전(의 실패)은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 >제15군 정보참모였던 후지와라 이와이치(藤原岩市) 소좌의 회고 중 이 말을 들은 무타구치는 부관을 노려보고는 '''삶의 의지를 곧추세웠다'''. 이 사건 이후 무타구치는 할복은커녕 다시는 죽겠다는 말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후지와라 이와이치라는 인물은 후에 [[미시마 유키오]]와 친구 사이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미시마 사건]]에도 관여했다는 의혹까지 받았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진위여부가 불분명하다. * 게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생존자들이 간신히 안전지대에 들어오자 장교 전원을 집결시켜 1시간 넘게 훈시를 하는 바람에, [[영양실조]] 상태에 있던 장교들이 쓰러져 기절하거나 심지어 사망한 사례조차 있었다. 아무리 영양실조 상태였다지만 일반 병사도 아니고 그래도 사정이 좀 나았을 장교들이 말이다. 그리고 이때 한 연설에서 >諸君、佐藤兵団長(第三十一師団、通称号:烈)は、軍命に背きコヒマ方面の戦線を放棄した。 食う物がないから戦争は出来んと言って勝手に退きよった。 >これが皇軍か。 皇軍は食う物がなくても戦い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兵器がない、やれ弾丸がない、食う物がないなどは戦いを放棄する理由にならぬ。弾丸がなかったら銃剣があるじゃないか。銃剣がなくなれば、腕でいくんじゃ。腕もなくなったら足で蹴れ。足もやられたら口で噛みついて行け。 >日本男子には大和魂があるということを忘れちゃいかん。日本は 神州である。神々が守って下さる・・・ >---- >제군들 [[사토 고토쿠|사토]] 그놈은 군령을 어기고 코히마(コヒマ) 방면 전선을 포기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전쟁을 포기하고 마음대로 퇴각했다. 이것이 황군인가? 황군은 먹을 것이 없어도 싸워야 한다. 병기가 없다, 탄환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같은 이유는 전쟁을 포기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탄환이 없으면 총검이 있다. 총검이 없다면 팔이 있다. 팔이 없으면 다리로 걷어차라. 다리조차 없으면 이빨로 물어뜯어라. 일본남자들이여 야마토 정신을 잊었는가? 일본은 신의 나라다.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라는 말이 나왔다. * 15사단장도 31사단장과 비슷하게 작전 취소를 건의했다고 경질되었는데, [[https://ja.wikipedia.org/wiki/%E6%9F%B4%E7%94%B0%E5%A4%98%E4%B8%80|새로 임명된 15사단장]]이 장교들의 군도를 검사하니 전부 녹이 슬어 있다고 화를 냈다. 하지만 장교들이 살고 있던 곳은 항상 물이 친 참호였으니 녹이 안 슬려야 안 슬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보급품이 부족해 비가림도 못했다. 녹이 스는 건 둘째치고 그 물바다 위에서 제대로 살 수가 있었을지는... 임팔이 위치한 마니푸르, 나갈란드, 아삼 일대는 몬순 기후와 히말라야 산맥과 아라칸 산맥 때문에 지구 전체에서도 비가 많이 오기론 손꼽히는 지역이다.[* 아삼 인근 메갈라야 주의 체라푼지란 마을은 1년 동안 비가 22,987 mm나 내리는 기록을 세웠다.] * 임팔 전선에 간 부대 가운데는 남태평양 지역, 특히 [[과달카날 전역]]에서 굶어 죽을 뻔한 부대도 있었다. 임팔에 비하면 과달카날은 천국이었다고 회고한 생존자도 있었다고 한다. * 무타구치는 죽을 때까지 임팔 작전의 의미가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교훈을 얻은 것에 있다고 하였다. 즉 1944년의 임팔 작전이 없었다면 동남아 전선의 붕괴는 더 빨랐고 더 파멸적이었을 거라는 말씀. 그러나 1945년 영인군의 버마 진공은 원래 계획에 없었다. 다시 말해 임팔에서 일본군이 다수의 정예사단을 말아먹은 덕분에 급하게 진공 계획을 세웠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약체 일본군의 저항과 우기에 대한 우려로 버마 진공 역시 간신히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오히려 임팔 전투 때문에 동남아 전선의 붕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확하다. * 전쟁 이후 [[영국군]] 중령 아서 제임스 바커(A. J. Barker)는 "델리로의 행진"(The March on Delhi)이라는 책을 쓰면서 무타구치와 서신으로 교류하며 증언을 구했는데, 이때 "버마방면군이 공세를 중단하지 않았다면 영국군이 큰 위기에 처했을 것"이라고 썼다. 바커가 사가로서 임팔 작전의 의도를 크게 평가한 것은 책의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지만, 이렇듯 무타구치가 거의 성공할 뻔하였다는 식으로 얘기를 한 것은 의례적인 칭찬에 가까웠다고 하는데, 무타구치는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영국군이 나를 인정해주었다'고 여겼다. * 한편 무타구치는 이 책의 서문을 써주었는데, 요컨대 이러하다. >일본에는 패장은 말이 없다는 말이 있어서, 나도 19년 동안 침묵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에 귀중한 기회가 왔으니 할 말은 하겠다. >디마푸르에 대한 공세만 제대로 계속되었으면 나는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방면군 사령관 가와베가 나를 무시하고 사단장 직통으로 작전을 중단시켜 물거품이 되었다. >반면 영국군은 야전 지휘관에게 작전 기도를 좇을 수 있도록 융통성을 부여했다. >나를 알아준 바커 중령은 일본의 무사도, 서양의 기사도에 걸맞는 사람이다. 바커 중령은 이걸 그대로 서문으로 실었다. 바커 중령이 무타구치를 비웃었다는 근거 없는 일화가 퍼져있지만, 실제로는 바커 중령은 무타구치를 비웃기는커녕 오히려 침묵을 지키던 무타구치가 설칠 수 있도록 배경을 제공한 인물이다. * 다나카 신이치, 가와베 마사카즈와 함께 나란히 인터뷰를 할 때 기자가 임팔 작전의 패전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한 답변. >'''설령 바커 중령의 증언으로 임팔 작전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더라도, 수많은 부하를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결단코 지울 수 없습니다. 역시 제 마음은 살아있는 한, 떳떳할 수 없습니다.''' * 바커와 서신을 교환한 이후, 무타구치는 공공연하게 바커의 편지를 내세우며 자신에 대한 비판에 맞서기 시작했다. 이미 망자가 된 사토 중장을 비판하고 바커가 쓴 편지 귀절을 담은 유인물을 인쇄하여 옛 부하들에게 보내기도 하였으며, 임팔 전투의 [[일본군]] 전몰자 유족들이 위령제를 지낼 때 그 자리에 나타나서 <임팔 전선의 패배는 나의 잘못이 아니라 부하들이 잘못 싸운 것>이라는 유인물을 나눠주려다가 물세례를 받았다. 이후로 이 전선에 참여한 부하였던 [[사토 고토쿠]]나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같은 옛 부하가 죽었을 때도 장례식에 출몰하여 똑같은 짓을 저지르다가 유족들에게 욕설과 함께 멱살을 잡히고 바깥으로 내쫓겼던 적도 있었다. 심지어는 [[유언|죽기 전 마지막 남긴 말]] 역시 참 압권이다. >'''私は惡くない、部下が惡い!''' >---- >[[유언/실존인물/동양|'''나는 잘못 없어. 부하들이 잘못했어!''']] * 저널리스트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는 『쇼와 육군』(昭和陸軍の研究, 1999)에서 임팔 생존병들의 공통된 특징 5가지를 꼽으면서, 그 중 첫 번째가 무타구치 렌야에 대한 격렬한 증오감이라고 설명했다. 그 중 한 병사는 아래 인용구에서처럼 매우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는데, 호사카가 인터뷰한 생존병들은 거의 대부분 무타구치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인격이 변했다 싶을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제15군 제31사단 소속이었던 병사는 내가 "병사 입장에서 무타구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때까지 온후했던 말투가 일변하더니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 전후에도 찔러 죽이고 싶었다"'''며 격분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갑작스럽게 변하는 바람에 내가 공포감을 느낄 정도였다.[* 실제로 전후에 자신을 못살게 굴었던 선임이나 장교, 부사관을 찾아가서 가족들까지 죄다 두들겨패고 복수하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무다구치 정도면 원한을 품은 사람이 만단위였을건데 용케도 한번도 보복당하지 않은 셈. 관련하여 산산조각 난 신에 묘사가 되어 있다.] >----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육군』, 정선태 역, 글항아리, 2016, 730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